길 위의 인문학 (희의 상실, 고전과 낭만의 상처)
최재목 | 지식과교양
13,500원 | 20180120 | 9788967641108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즐거운 일이다. 글이 나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에 고통과 즐거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 책은 철학자이자 시인인 최재목 교수가 최근 10여 년 간, 길 위에서 사색해 오며 써온 글들을 엮은 것이다. 최재목은 머리말에서 “그 동안 내가 해왔던 길 위의 방황과 유랑, 안착하지 못한 한 인간으로서의 실존적 고독과 번뇌, 사람 사이에 살아가는 힘든 순간순간, 나는 이것들을 외부적 투쟁이 아니라 솔직히 내적인 글쓰기로 뚫고 나가려고 했었다. 가능한 한 남들과 소통하는 투명한 언어로 나즉히 나를 빨래 줄에 내걸 듯 보여주려 했다.”고 밝힌다.
많은 다양한 글들을 [1. 걷기, 멍 때림; 2. 필로소피아에서 철학으로; 3. 유럽이 지은 ‘인문의 숨결’; 4. ‘고전’과 ‘개성’의 사이에서; 5. 위로의 인문학; 6. 문학, 예술의 허허 벌판에 서서]처럼 여섯 파트로 나누었다. 최재목이라는 한 인간의 고민이 유사한 ‘문법 내’에서 대화하고 있다.
동양철학, 비교동아시아사상사, 시 작업, 예술비평 등을 통해서 저자는 가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의아해 하며, 헷갈리는 지점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즐거운 도전이고 시련이었다. 탈경계, 무경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저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느슨하게·탄력적으로 지키면서 다양한 장르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내면을 넘어서는 ‘내월’(內越), 그리고 타자와 수많은 장르를 넘어서는 ‘간월’(間越), 서로 함께 껴안고 기어서 함께 넘어서는 ‘포월·공월’(抱越·共越)의 작업을 거쳐야만 한다”고!
이 책은, ‘길 위’ 사색과 고뇌를 담은 ‘인문학’이 주제이다. 하지만, 부제로 붙였듯이, 철학이 상실한 끊임없는 ‘희구(希)’의 정신을 얼마라도 살려보려고 하였다. 아울러 고전주의 딱딱하고 경직된 형식적, 꼰대적인 ‘본’ 지향과 낭만주의 ‘개성·자유·생명’ 지향을 대비적으로 보여주면서 궁극적으로는 낭만주의의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고전주의는 원본·원초로 돌아갈 수 없는 상실감·그리움에서 생겨났으며, 그 이후는 낭만주의로 대체됐지만 우리 학문에서는 그것이 뒤죽박죽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는 ‘걷기, 나를 찾아 가는 가장 순수한 몸짓’ 중에서 말한다. “대지와 하나 되는 것, 맨발은 그것을 가르친다. 걷기는 삶의 가장 순수한 몸짓을 풀어내고 거두어들인다. 순전히 두 발로, 그것도 맨발로, 홀로 일어서는 직립의 힘이다.” 최재목 인문학의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바로 ‘직립의 힘’이다.
[문학, 예술의 허허 벌판에 서서]에서는 저자 자신의 자유로운 비평 정신을 보여주면서, 실제적으로 그가 ‘길 위의 인문학’을 어디로 끌고 가고자 했던가의 실례를 적절히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위로의 인문학] 부분에서 등장시킨, 요절한 가수 ‘배호’이야기였다. 아니 철학하는 사람이 무슨 배호를? 이유가 있다. 저자는 배호를 호출해서 우리의 현대사에 엄연히 존재한 상처를 밝히면서 ‘위로의 인문학’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문학로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다시 짚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말한다. “한 마디로 배호 노래는 나에게 애절한 ‘그늘’이었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늘이 있듯, 드러나는 삶에 따라붙는 어두운 구석이었다. 그것은 필시 우리 사회의 그늘이기도 했으리라. 몸이 아프면 신음(呻吟)이 있듯, 사회가 아프면 소리가 있는 법. 소리는 ‘세상의 음악’(世音)이고, 시(詩)이다.” 그래서 이것을 ‘절망=희망’ 레이아웃하기로 이끌어 간다. 그에게 절망은 바로 희망을 이야기 하는 근거였다.
여하튼 독특한 인문학의 가능성을 만나게 하는, 최재목이라는 한 인간의 여태까지의 고뇌와 참신한 모색이 담긴 에세이집이다.